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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성판악 코스를 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Rena 리나 2020. 11. 2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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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까지 2.5km 남음. 이 때만 해도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제주도 여행을 많이 갔었지만,

백록담까지 등반을 한 적은 없었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을
꼭 한 번 등반해 보고 싶었기에
이번 제주 여행에서 1순위로 일정을 잡았다.

출발 당일,
6시쯤 호텔을 나와
9시쯤 성판악에 도착했다.

평소에도 등산을 자주 가곤 했던 나와 짝지는
성판악 코스가 가장 쉽다는 얘길 듣고
한라산을 얕잡아봤다.


산 중턱

우리가 준비해간 것은
물 2L,
에너지바 3개,
소세지 1개가 다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미친 짓이었다.


산 중턱쯤 올랐을 때,

배가 눈치 없게 고프기 시작했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다 먹어버렸다.


불길함의 시작이었다.

 




장엄한 경치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성판악에서 진달래밭대피소까지 거리 같았다.

 

다리의 근육세포를 낱낱이 불태워서 깨우는 느낌.

그 와중에 경치가 멋져서 감탄은 해야겠고.

 

몸은 욕하고 정신은 감탄하는
혼돈의 시간을 보냈다.

 

 

 

잠자리 보고 부러워서 울 뻔

정상에 다다르자 잠자리떼가 날고 있었다.

유유히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을 보니
부러워서 눈물이 났다.

왜 인간은 잠자리를 타지 못하는가?


백록담

드디어 정상에 왔다.

배고픔이 극에 달했다.

정상에서 점심을 드시는 분들이 진짜 많았는데,
머릿속에는 자꾸 십시일반 십시일반 이러고
한 입씩만 얻어먹어도 끼니 해결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혼자가 아니라
짝지랑 같이 있으니 참았다.

 

짝지가 없었다면
나는 ‘백록담 한입충’으로
유튜브 스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백록담

나는 백록담에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옛 선조들의 참뜻을 깨우쳤다.

 

지금 배부른 상태에서 보는
사진 속 백록담은 너무나 장관이지만
당시에는
‘저기에 산딸기 같은 것이 있을까?’
‘백록담에 잡아 먹을 물고기가 있을까?’

이런 생각만 했다.



 

배부를 때 다시 보고 싶구나

내려갈 때 지옥길이 펼쳐졌다.
다리도 아팠지만,
배가 너무 고픈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중엔 좀비마냥 기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물은 조금 남아 있었다.
중간에 물이 없어서 물 찾는 사람들을 보고
음식과 맞교환하고 싶었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재난영화 한 편 찍고 오는 건데.

물이 더 귀해서 물을 소중히 감추고 내려갔다.

죄송합니다.


물을 감추어서 벌받는 걸까
내려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고 기계마냥 저절로 움직였다.

그 때 멈추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다리는 저절로 움직이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한 번 쉰다고 주저앉았더니
다리가 아예 고장이 나버린 것이다.

심지어 앞이 어질어질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갑자기 눈앞에 아이패드를 보았다.


퍼질러 앉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내게
짝지가 희망을 주고자 물었다.
“내려가면 뭐 하고 싶어?”

내 대답
“아이패드 살 거야.”


진짜로 삼

 다음날, 바로 아이패드를 샀다.

 

극한의 굶주림과 산행 속에서
내가 원하던 것을 진짜로 본 것이다.

한라산에서 곧 죽더라도
아이패드는 가져보고 싶었다.


싱싱한 아이패드

이 아이패드에는
한라산을 기어서 겨우 내려온
내 기억이 담겨 있지...

완전히 하산했을 때가 저녁 6시 반이었다.


월정리 카페에서 신선놀음



한라산 성판악 코스 후기

음식과 물이 관건이다.



본인이 아이패드를 진심으로 원하는지 알아보려면
제한된 음식과 물을 갖고 가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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